기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지영
전시 [이 선생에 관하여]는 월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사건에 출발점을 두고 있다. 동명의 영상 작업인 <이 선생에 관하여 How to (not) live a legacy?>(2023)는 한 월북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삼대 간의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기에 때로는 타인에 의해 수정되거나 보완된다. 기억이 고정불변의 속성을 갖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기억하고 망각해야할지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의존적 제약의 관계는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에도 관여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특정 문화의 질서에 복종하는 사회적 주체로 탄생시키며 개인의 기억과 망각, 발화와 침묵을 통제한다.
따라서 황제인은 사회적 주체들의 기억과 망각의 과정에 접촉하는 이데올로기의 결절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역학관계에 얽혀있는 주체들의 기억을 유동적 속성으로 감각하여 우리에게 그 액체적 요소들이 뒤섞여 발생시키는 화학적 변화를 제시한다.
영상에서 여성은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월북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듣게 된다. 월북자의 가족은 연좌제를 피할 수 없었던 만큼 당시 월북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의 존재와 관련된 기억이 어째서 이 시점에 발화된 것일까? 황제인은 과거에는 망각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사실이 어떻게 현재에는 기억해도 되는 것으로 변화되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렇게 우리는 여성의 가족들이 망각의 저장소에 억류해두었던 개별기억이 처음으로 흘러나와 공동기억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과정을 마주한다.
또한 이 공동기억의 성형 과정에서 우리는 여성들의 말하기에 얽힌 문화적 질서의 억압을 보게 된다. 영상에서 어머니는 ‘이 선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목소리를 낮춘다. 이는 가부장적 문화에 종속된 여성에게 체화된 제약과 두려움을 적실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선생의 존재를 여성에게 밝힌 것은 어머니였으며 그 새로운 사실이 외할머니, 고모할머니와의 접점을 생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접점은 당시 여성들에게 더욱 금기시되고 망각되기를 요구했던 기억을 소환하여 최초로 발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발생시킨다.
황제인은 <이 선생에 관하여 How to (not) live a legacy?> (2023)에서 시작점과 목표점이 구별되지 않는 서사 구조를 실험하고 있다. 그는 고의적으로 명확한 구조갖기를 부정하며 혼란과 충돌을 택한다.
촬영자인 여성은 카메라 렌즈가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프레임 안과 밖의 영역을 구획짓는지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은 능동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화자가 아니라 청자로서 수동적 위치에 머무르기를 택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여성은 어머니가 나무를 보며 떠올린 일종의 전형성을 띄는 영감에 기반한 제언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영상에 담는다. 그러나 외할머니를 인터뷰하던 어머니는 ‘네 할 일의 반은 내가 하고 있다. 작가 이름에 내 이름도 올리라’며 여성의 태도를 비판한다. 현시대를 바라보는 견해차가 불거지자 여성에게 ‘삐딱한 시각을 가진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도 한다. 크고 작은 다툼이 발생하지만 여성은 끝내 충돌을 수용한다.
영상 속 화자들의 말하기에는 친밀함과 어색함, 미숙함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황제인은 이렇듯 풍부한 감정을 드러내며 지식에 물들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을 주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긴장과 갈등, 협력을 통해 생성하는 우회로의 굴곡을 하나하나 따라간다. 지형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경로를 택하여 그는 쉽게 억압되고 망각되어온 것들에 자신의 권한을 부여하고자 한다. 즉,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구분짓고 서사의 방향을 기획할 수 있는 작가의 익숙한 권한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한을 부여받은 주체들은 언제든 변화가능한 과정성과 관계성에 집중하여 하나의 목표점을 갖지 않는 의미를 창조해낸다. 그리고 황제인은 우리가 이 역동적 상호작용에 실시간으로 가담하며 개방적 시각을 갖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이전 작업에서 광주민중항쟁과 한국전쟁에 주목한 바 있다. 두 역사적 사건은 아직까지도 정부차원의 적확한 진상규명과 유골의 신원확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사건 관련자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사건에 얽힌 기억은 과거 세대에서 미래 세대로 이행되는 내내 계속해서 현재 시점으로 호명되며 사건 관련자들의 일상에 난입하고 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매개한다. 이에 황제인은 다음의 문장을 인용하여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기억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들이 삶에서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트라우마의 잔재와 화석화된 기억을 해석할 윤리적 의무가 맡겨진다.”1
트라우마의 잔재와 화석화된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특정 사실을 어떠한 의미로 기억해야한다고 강요한다. 그들은 미래 세대가 자유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화석화된 기억은 ‘과냉각 액체’라는 유리의 속성처럼 유동적이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에 의하면 기억은 삶이고, 언제나 살아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고 그런 이유로 영원히 진화되어가며, 기억력과 건망증의 변증법에 노출되어 있고, 인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왜곡되며, 활용되거나 조작되기 쉽고,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회복되기도 한다.2 이처럼 액체적 속성을 가진 기억은 살아있는 후속 세대에게 운반되며 변화하는 사회적 맥락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 될 것이다.
전시 [이 선생에 관하여]에서 ‘이 선생’은 화석화된 기억과 같다. 실제로 살아있는 몸에 담겨 흐르게 될 때에야 이 선생은 진화되고 재구성되며 역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노라는 기억이 사실상 내용물이라기보다 하나의 틀이며 가변적인 쟁점이고, 전략들의 집합이며, 존재하는 것보다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더욱 가치가 있는 어떤 실재라고 보았다.3 달리 말해 기억은 이데올로기의 작동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를 부여받는 실재이다. 그 가치의 틀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해석할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 포위당한 이데올로기적 주체라는 사실을 견인한다.
황제인은 화석화된 기억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유산을 살(지 않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부여하는 윤리적 의무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할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즉, 황제인의 작업은 ‘우리의 몸에 어떤 기억을 담을 것이며, 그 기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실천적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1. “The younger generations are left with an ethical obligation to interpret the remnant of trauma and fossilised memories they have never experienced throughout their lifetimes.” Crystal Mun-hye Baik, Reencounters: On the Korean War and Diasporic Memory Critiqu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2020), 16. Jane Hwang, How to (not) live a legacy? An Essay Film About Intergenerational and Posthumous Dialogues, 2023, p.37.에서 재인용
2.
피에르 노라, 기억의 장소 1, 나남, 2010, p.34.
3.
앞의 책, p.14.
Interpretation of Testimony
Min-hyung Kang
Here I write a story about a testimony which is dewed round and convex and remains thus and about the possibility or impossibility of the literacy of testimony.
The voice of the people who have lived through a unique history that is marred by physical and mental sufferings is transcribed as testimony. Unique is an apt description based on the number of people who directly experienced the event, but as the wound of history leaves a conventional agony and self-reflection, it becomes less certain whether it is correct to describe it as something unique with all the accumulated history.
Testimony is the resilient return and manifestation of a voice that could have disappeared. A movement of lips that disappeared beyond trace, buried in a grave, or disappeared into thin air comes back all of a sudden and is empowered in the medium of voice or writing. How much of this reappearance can we see, willing to see, and get to see?
‘Round, Convex, them’ is a work about this testimony. What I get to inquire through this work is where to this testimony disappears, gathers and heads, or if we can understand this testimony. Is not saying that a testimony lacks literacy equivalent to sending the revived voice and writing back to grave? Jane Hwang wondered, “what kind of monuments will be raised on the premise of this testimony.” But I questioned myself whether we have the literacy and if it was possible that the testimony would be so scattered that even a memorial could not be erected.
In the sense that individual testimonies are subjective and lack hard evidence, they do not settle well like a paper fluttering in wind. Like a piece of transcript of a speech that came from a grave and sought to seep into the city somewhere but ended up flapping away due to its lightness, its weight belies its substantive weight. Is it not because our literacy for testimony falls short of that for fictions that sometimes novels, movies and theatrical works carry more weight than real stories?
These fluttering testimonies flock together in this digital space for a soft landing. Applying the framework of debate between reality and virtualism to this is the limit of today’s controversialists. The conversation about reality and virtualism that is so prevalent in the art scene may not have any bearings on improving the literacy of this testimony. Framing this as an attempt to materialize the power of voice and writings in the digital space, which is easily treated as non-material, will only be read as self-contradictory. I thought this digital space was meaningful only in the sense that it allowed the artist to shape it most freely. Despite the fact that this testimony is covered in documentaries, mass media and many other art works, to tell this story, it is imperative to have the easiest and the most flexible framework for artists to control—which in today’s world is sadly the digital space. One can think of this as a futile attempt, and this bitterness was felt during my conversation with Jane Hwang. But what I am thinking more of than such emotion is that we should think of this as a compass for the misty road of how we have brought the testimony here and where we can go afterward.
I described them as fluttering pixels in the digital word, but these testimonies are sometimes translated into English and presented in Berlin. What power does the context of our testimony has in the background of Berlin that is located at the apex of languages of colonial superpowers and debate for decolonialism? Will this testimony be included and united from the perspective of conventional historical retrospection or be diagnosed as a trauma left on an Asian nation by history? The reason why we can’t look at this project, which intertwines a digital medium and the geographic locations of Korea and Berlin, from the context of reality and virtualism could be because of this expectation. Just like the powerless shouting in the online community of the meme that says “get a life.”
The audience who are invited to this website start their engagement from a computer in a private space other than an art gallery or a history museum. A decently well-structured narrative exists, but in the face of this bundle of testimonies which only unfolds by moving hands and moving forward rather than appreciating the narrative arc, do our explorative power and literacy function properly? If this space with strictly limited autonomy is treated as a test, the scores and tiers would make no sense. Among all the voices and writings that surround us, who are fed by all kinds of stories—many untrustworthy—and constantly betrayed by stories, the testimonies that are dewed round and convex are staring at us form inside the monitor screens. Testimony sees us now, and we cannot help but see it.
증언의 문해
강민형
둥글고 볼록하게 맺혀, 그저 맺혀 있을 뿐인 증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증언을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없는 증언의 문해력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다.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고통을 수반하는 어느 특수한 역사를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적힌다. 사실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의 숫자로만 보면 특수하다는 표현이 맞지만, 모든 역사의 생채기는 그 어떤 보편적인 고뇌와 반성을 남기기 마련이라, 더 이상 그것을 특수한 어떤 상황으로 치부하는 것이 이 쌓아 올려진 역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증언은 사라질 뻔한 목소리가 꿋꿋이 다시 돌아와 발화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사라져 흔적도 알 수 없이 무덤에 묻히거나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린 입술의 움직임이 불현듯 돌아와 목소리와 글이라는 매체의 형태로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 귀환을 어디까지 볼 수 있고, 보려고 하고, 보게 되는 것일까.
‘둥글고 볼록하게 맺힌 것’은 이러한 증언들에 대한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내가 질문하게 되는 것은 그 증언들이 어느 방향으로 흩어져 버리는지, 혹은 뭉쳐서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또 이 증언을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이기도 하다. 증언의 문해력이 없다는 것은 살아 돌아온 그 목소리와 글을 또다시 무덤으로 보내는 것이 아닐까. 황제인 작가는 ‘이 증언의 더미로 또 어떤 기념비가 세워질지’ 궁금하다고 했지만, 어딘가 나는 이 증언들이 그 어떤 기념비도 세울 수 없는 상태로 미약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이 되지는 않을지, 내심 우리의 문해력을 의심했다.
주관적이고 물질적인 증거가 없다는 면에서, 때때로 개인의 증언은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는 종이처럼 안착하지 못한다. 마치 무덤에서 날아와 도시 어딘가에 스며들고자 하지만 그 가벼움에 다시 날아가 버리는 구술 녹취록 한 장의 무게처럼, 그 내용의 무게와 대비된다. 때로는 소설이나 영화, 극이라고 하는 것이 실화보다 더 무거운 힘을 가지게 되는 것도 우리의 증언에 대한 문해력이 픽션의 그것보다 낮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펄럭이는 증언들은 이 디지털 공간에 모여 안착을 시도한다. 이것을 현실과 가상의 논의로 가져가는 것은 이 시대 논쟁 애호가들의 한계이다. 예술계에 만연한 현실과 가상에 대한 토론은 이 증언의 문해력을 높이는데 그 어떤 연관성을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쉬이 비물질로 치부되는 디지털 공간에서 사라져가는 목소리와 글의 힘을 다시 물질화하려는 시도로 정리한다면 자가당착으로밖에 읽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디지털 공간이 작가가 가장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대중 매체에서,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이 증언들을 다루지만, 그래도 또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제어하기에 가장 용이하고 유연한 토대가 필요하며, 그것은 안타깝게도 지금의 시대에서는 디지털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질없는 시도로 볼 수도 있고, 그리고 그러한 씁쓸함이 황제인 작가와의 대화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그 감정보다는 이제 우리가 증언을 끌고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그리고 여기서 어디를 더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길의 나침반처럼 여기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세계의 펄럭이는 픽셀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증언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베를린에서 발표되기도 한다. 식민 강대국의 언어와 탈식민주의 논의의 정점에 존재하는 베를린이라는 배경에서 우리의 증언의 맥락은 어떤 힘을 가지는가. 이 증언은 위에 말한 보편적인 역사 돌아보기의 관점에서 포섭되고 통섭 될 것인가, 혹은 역사가 한 아시아 국가에 남긴 후유증처럼 진료 기록화될 것인가. 디지털 매체와 한국/베를린의 물리적 위치가 엮이는 이 프로젝트를 현실과 가상이라는 맥락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 힘없이 외치는, 제발 현실을 살아! 같은 밈처럼 말이다.
이 사이트가 초청하는 관객은 미술관이나 역사기념관이 아닌 자신이 혼자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의 컴퓨터에서 개입을 시작한다. 어느 정도 짜여진 서사가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기승전결의 감상보다는 손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야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증언들의 뭉치에서 우리의 탐사력과 문해력은 제대로 기능하는가. 아주 최소한의 자율성이 주어진 이 공간을 어떤 테스트라고 생각한다면 점수와 티어가 가관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만가지 이야기로 가득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고 끊임없이 이야기로부터 배신당하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목소리와 글 사이에서, 둥글고 볼록한 모양으로 그려져 맺혀진 증언들이 스크린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 증언이 우리를 본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그것을 본다.